불교속으로

살아있는 것들에게 폭력을 쓰지 말라. 살아있는 것들을 괴롭히지 말라.

너무 많은 자녀와 친구를 갖고자 하지도 말고, 

저 광야를 가고 있는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슷타니파타 ) 

 

참회 (懺悔) 

우리는 생활 속에서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많은 죄악과 허물을 짓게 됩니다. 이러한 죄악과 허물은 대부분 세속적 욕망과 이기심에 의해 생겨납니다. 이러한 잘못을 뉘우치고 정화하지 않는다면 불자의 삶은 결코 진리에 다가설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참회할 것인가?

참된 참회는 자기 성품 속에서 죄의 반연을 없애는 것입니다. 죄의 반연이란 삼독의 나쁜 인연을 가리킵니다. 만약 당장에 본래의 청정한 법신을 찾고자 한다면 바로 이 삼독의 악연을 마음속에서 씻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삼독은 어떻게 씻어낼 것인가?

《육조단경》에서 육조 혜능스님은 참회에 대해 이렇게 설하고 있습니다. 

선지식이여, 이것이 무상참회(無上懺悔)이니라.

참(懺)이란무엇인가?

참이란 지나간 허물을 뉘우침이니, 지금까지 지은 모든 죄를 뉘우쳐서 영원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회(悔)란 무엇인가?

회란 이후에 짓기 쉬운 허물을 조심하여 다음부터 있을 모든 죄를 미리 깨닫고 영원히 끊어서 다시는 짓지 않도록 하는 것이니 이것을 합하여 참회라 하는 것이니라. 범부들은 어리석어서 지나간 허물을 뉘우칠 줄 모르고 앞으로 있을 허물은 조심할 줄 모르므로, 지나간 죄도 없어지지 않고 새로운 죄가 잇달아 일어나니 이러고야 어찌 참회라고 할 수 있으랴?

《육조단경》〈참회품〉

 이처럼 참회는 과거의 잘못을 뉘우쳐 다시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삼독의 잘못을 알고 다시는 그러한 잘못을 짓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마음에서 삼독을 없애 나가는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탐·진·치 삼독을 셋으로 나누어서 한 가지씩 씻어내면 됩니다. 그 요령은 108배를 하되, 부처님이 실제로 앞에 계시다고 가정하고, 한 번의 절을 할 때마다 한 가지씩 참회를 해나가는 것입니다.

우선 탐욕과 관련된 상념들을 한가지씩 떠올려서 충분히 확인하고 스스로의 성품에 되뇌입니다. "이러이러한 욕심을 내었습니다. 잘못되었습니다. 다시는 그러한 잘못을 짓지 않겠습니다." 하고 마음속으로 다짐해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욕심들을 참회해나가되,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과거로 향해 거슬러 올라가면서 진행해 나갑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보다 근원적인 욕심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어쨌든 더 이상 기억이 나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 나갑니다.

다음은 성냄에 관해서 참회합니다. "이러이러하게 화를 내었습니다. 잘못되었습니다. 다시는 그러한 잘못을 짓지 않겠습니다." 하고 반성해 나간다. 시기질투하고 남 흉보는 것도 일종의 성냄이다. 역시 참회해야 한다.

여기에서 명심해야할 것은 무조건적인 참회를 해야한다는 점입니다. 조건부 참회가 되어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원인이야 어쨌건 간에, 자신의 성품 가운데에 소용돌이를 일으켰다는 것은, 무언가 자취를 남긴 것이므로, 언젠가는 그것을 확인하여 없애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조건부 참회는 다만 자신의 그릇에서 맴도는 것이므로, 인식의 변화를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리석음에 관해서 참회합니다. 어리석음 가운데 가장 어리석은 것은 스스로 잘났다는 생각입니다. 자기가 한껏 못났다고 생각해야 참회가 됩니다. 우리의 본성이야 잘나고 못나고를 초월해 있는 것이지만, 다만 분별의식이 못났다는 것입니다. 꾀죄죄한 나를 잘났다고 착각하여 남과 비교해 잘잘못을 따지는 것, 이것이 정말 못난 것입니다.

또한 인과를 믿지 않는 것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베푼 만큼 돌아오고, 지은 만큼 받는 것입니다. 이를 확신하지 않는 까닭에, 은덕은 조금 베풀고서 대가를 많이 받지 못해서 안달하고, 허물은 많이 짓고서 과보를 조금 받으려 전전긍긍합니다.

이처럼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못하기에, 자신을 흠뻑 사랑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흠뻑 사랑할 수 있을 때 다른 모든 존재를 한없이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참회를 통해 얻어지는 귀중한 결실입니다. 완전한 존재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나를 사랑하려 한다면 인생을 낭비하고 말뿐입니다.

이렇게 해서, 참다운 자기사랑에 점차 눈이 떠가면, 남의 허물을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스스로에게 못마땅한 점이 많은 사람일수록 남의 못마땅함을 잘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의 허물이 자주 눈에 띄면, 얼른 내 마음을 바로 잡을 일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108염주를 돌리면서 낱낱이 감사의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주위에서 감사할 일을 찾아내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심지어 자신에 대해 불평불만인 사항까지도 감사한 마음이 들 수 있을 때까지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이와 같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굉장한 자기긍정을 가져오며,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는 강력한 출발점이 됩니다.

 

 

 

발원 (發願) 

많은 사람들이 불교에 관하여 갖는 의문 가운데 하나는 '불교에서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욕심이 없이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그리고 누구나 한번쯤은 가져봄직한 의문입니다.

치열한 생존경쟁의 험난한 세상을 살아나가면서 상대방을 짓누르기보다는 무조건 양보하고 욕심을 내지 않으려 하다가는, 얼마 안가 도태되고 말 것이 아니냐는 주장입니다. 심지어 일부 불자들이 무기력해 보이며, 세상에 대하여 염세적이고 피동적인 자세를 견지하는 것도 이러한 불교 관에 근거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불교 특히 대승불교에서는 발원(發願)을 수행의 첫걸음으로 삼고 있음에 유의하여야 합니다. 원(願)을 발(發)한다는 것, 이것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욕심과는 다릅니다. 욕심과 발원의 차이는 크게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욕심은 다분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바램이지만, 발원은 공통적 바램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나만을 위한 원이 아니라, 우리 모두, 인류 전체, 나아가서는 일체 중생에 대한 기원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와 남은 구분되지 않습니다. 남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며, 남이 잘되는 것이 곧 내가 잘되는 것입니다.

둘째, 욕심은 본능적인 것이지만, 발원은 능동적인 것입니다. 잘 먹고 잘 살고, 부와 명예를 바라는 것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타고난 것입니다. 하지만, 발원은 애당초 없는 것을 만들어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 꿈에도 남에게 주고자하는 마음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부러 원을 발하여 자꾸 베푸는 마음을 연습함으로써, 아상(我相)의 소멸에 접근하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욕심은 결과를 중시하지만 발원은 과정 그 자체를 중시합니다. 한마디로, 발원은 결과에 대한 집착이 없는 것입니다. 욕심은 미래에 중점이 두어져 있기 때문에, 그러한 욕망 달성을 위해서 때로는 현재를 희생할 것을 강요합니다. 하지만 발원은 현재에 중점이 두어져 있습니다. 물론 스스로가 세운 원을 달성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기는 하지만, 결과에 대한 집착이 없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 노력하는 자체가 즐거운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의미에서 보건대, 발원은 참다운 자기전환의 시작이라 말 할수 있습니다. 업생(業生)이 아니라 원생(願生)으로 나아가는 첫 단추인 것입니다. 업생이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과거의 지은 바 업에 이끌려 살다 가는 것입니다. 
원생이란, 스스로의 삶을 갈무리해나가는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방향을 설정해서 과거의 업을 벗어나 새로운 창조적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나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생을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발원이 필요합니다. 걸림만 없다면 무엇이든 마음에 그리는 대로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마음 속 어딘가에 걸림이 있기 때문에, 즉 '못한다' 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든지, 의욕이나 선입관을 가지고 할 것이 아니라, 원을 세워 해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초심자에게는 반드시 발원이 필요합니다. 발원이란 탐·진·치 라는 속성에너지의 방향전환입니다. 그것은 욕심을 완전히 부정하여 억제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욕심을 일단 인정하되 다만 방향을 바꾸어 도심(道心)으로 인도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탐·진·치의 대전환에 다름 아닙니다. 탐심을 돌이켜 대신 심으로, 진심을 돌이켜 대분심으로, 치심을 돌이켜 대의심으로 만들어 수행의 방해물을 오히려 수행의 자량으로 삼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야말로 번뇌가 곧 보리하고 하는 대승불교의 진수입니다. 돌은 그저 돌일 뿐입니다.

그것에 걸려 넘어지면 걸림돌이요, 딛고 넘어가면 디딤돌이 됩니다.

이것은 존재의 속성인 탐·진·치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여 이에 역류하고자 인위적 노력을 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에너지, 즉 끊임없는 향상성들을 오히려 도를 깨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하는 것이며, 이것이 발원의 참된 가치입니다. 그러면 실제 발원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우선 발원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것으로 사홍서원이 있습니다.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衆生無邊 誓願度)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煩惱無盡 誓願斷)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法門無量 誓願學)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佛道無上 誓願成)

이 사홍서원은 대승보살들이 보리 성취(上求菩堤)와 중생구제(下北衆生)를 위한 보편적인 실천덕목으로 제시된 것입니다. 보살이 성불을 이루기 위해서는 3아승지겁의 수행이 필요한데 그 동안에 모든 자리이타(自利利他)의 행을 완성해야 합니다. 따라서 그때뿐인 결심으로는 이것을 달성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보리심을 일킨 보살은 어떠한 곤란에도 물러서지 않는 견고한 결의를 일으켜야 합니다. 이 결의가 바로 서원입니다. 그리고 이타행을 통해 무량 무수의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 제도하면서도 누구를 제도한다거나 누가 제도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 그래서 아무런 공덕도 구하지 않는 것이 바로 보살의 서원입니다. 따라서 이 보살의 서원은 어떤 공격도 물이칠 수 있는 갑옷을 입은 것과 같이 견고하다 하여 '큰 서원(弘誓)의 갑옷(大鎧)을 입는다'(僧那僧涅 大誓莊嚴) 고 표현합니다.

이러한 서원은 발원이 바로 업에 이끌려 사는 삶, 남의 짐이 되는 삶에서 스스로 창조해가는 삶, 남의 짐을 덜어주는 삶으로의 전환이라는 것을 잘 표현해 줍니다. 결국 사홍서원이란 자신의 업력을 이겨내는 원력을 행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을 낮추고 일체의 중생을 부처님과 같이 공경하여야 합니다. 밖의 중생을 공경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마음속의 중생도 공경하여야 합니다.

여기에서 공경한다는 것은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인정하고 관심을 보여줌으로써 모두 함께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서원은 클수록 좋겠지만, 가급적이면 자신의 현재 상황과 부합하는 것으로 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예컨대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이 간절할 경우에는 '일체중생이 모두 다 깨달음을 얻어지이다.' 하고, 병고에서 벗어나고자 하거든 '일체중생이 모두 다 병고에서 벗어나 지이다.' 하며, 마음 편안함을 성취하고자 하거든 '일체중생이 모두다 마음이 편안하여 지이다' 하는 식으로 발원해나가는 것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내가 어서 깨쳐서 중생들을 제도하겠습니다.' 해야 할 것 같지만, 여기에는 나라는 생각과 남이라는 생각, 그리고 제도한다는 생각과 제도된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깨친 이의 특징이 이러한 네 가지 상(相)의 소멸이라고 할진대, 내가 수행해서 내가 깨치고 제도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오히려 네 가지 상이 증장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혹은 특별한 바램이 없는 경우에는 다음과 같이 하는 것도 좋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몸과 마음이 밝고 건강해져서 재앙은 소멸하고 소원은 성취해서 부처님 시봉 잘 하길 발원합니다.'

 

기도 (祈禱)_ 기도란 

보통 때에는 전혀 종교적 성향이 없던 사람이라도 위기에 처하거나 심각한 상황에 부딪치면 종교에 의지하곤 하는 일을 자주 목격할 수 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되면 무언가 의지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기도란 일반적으로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느낄 때 신이나 그 밖에 신비한 힘에 의지하여 그것을 이겨내고자 간절하게 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기도는 권청(勸請) 즉, 일체 중생들이 어리석은 마음을 떨쳐버리고 하루 속히 지혜의 눈이 열리도록 부처님께 청하는 의식으로서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력과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여 모든 이웃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회향하겠다는 서원의 뜻이 더 큽니다. 즉 불교의 기도는 불·보살님의 위신력을 찬탄하고 다생에 지은 모든 업장을 참회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일체중생과 함께 하기를 발원하고 회향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발원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의지하며 이 생명 다하도록 실천하겠다는 성스러운 마음에서부터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통해서 나와 이웃 그리고 모든 중생들에게 불·보살님의 공덕이 함께 하기를 서원하고 또한 자신의 편협한 마음을 부처님 마음으로 되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기도는 선지식과의 만남을 통한 자기와 이웃과의 만남을 뜻합니다.

따라서 기도의 마음가짐은 우선적으로 간절한 마음이 앞서야 하겠지만,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부정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즉 내 힘으로 어떻게 해 보겠다는 생각이 적을수록 기도는 오히려 잘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직 모든 것을 부처님께 맡겨버리는 것, 그것이 중요한 관건입니다. 심지어 잘 되고 못 되고 까지도 부처님께 맡겨버릴 수 있다며, 이미 성취한 기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의 성취를 위해서는 반드시 서로 정합이 되는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적멸보궁이나 유명한 기도도량에 가서 간절히 기도하면 한가지 소원은 이루게 해준다고 하는 것도 이런 의미로 보아야 합니다. 부처님이 왜 한가지 소원만 들어주고 싶겠는가? 수 백가지 수만가지 모든 중생의 소원을 모조리 들어주고 성취시켜주고자 하는 것이 부처님의 대자대비심입니다. 다만 한가지 소원은 들어준다고 하는 것은, 정합이 되는 소원, 즉 앞과 뒤가 맞아떨어지는 소원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옳을 것입니다. 동쪽으로 가고자 하는 소원과 서쪽으로 가고자 하는 소원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한 그 소원성취는 요원한 것입니다.

기도의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천수다라니나 능엄주 혹은 관세음보살 육자대명왕진언, 광명진언 등을 지송하는 것을 주력(呪力)이라고 합니다. 《금강경》이나 《지장경》, 혹은 《화엄경》〈보현행원품〉, 《법화경》〈관세음보살보문품〉, 《원각경》〈보안보살장〉 등 경전을 읽고 지송하는 것을 간경(看經) 혹은 독경(讀經)이라고 합니다. 석가모니불이나 아미타불, 혹은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미륵보살 등과 같이 불보살님의 명호를 지속해서 염하는 것을 염불(念佛) 혹은 정근(精勤)이라고 합니다. 이외에도 백팔배, 삼천배 등과 같이 절을 하는 방법을 비롯해서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기도는 가능한 한 매일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요령'으로 해나가는 것이 좋습니다. 부드럽기 짝이 없는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 것은 지속적으로 같은 자리에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기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은 여기, 내일은 저기에서, 이 시간에도 했다가 저 시간에도 했다가 해서는 성취를 보기가 어렵습니다. 또 한꺼번에 여러 시간을 했다고 며칠은 쉬고 해서는 곤란합니다. 규칙적인 식사습관을 지닌 사람은 식사시간이 가까워지면 몸 속에서 먼저 알고 준비를 하는 것처럼, 기도도 항상 '같은 시간에·같은 장소에서·같은 요령으로' 하다보면 몸과 마음에 분위기 조성이 잘 되어져 기도삼매를 쉽게 성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남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규칙적으로 낼 수 있는 시간을 정해놓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장소도 가급적이면 가까운 법당을 정하여 동일한 자리에서 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기도의 요령도 한가지를 정해놓고 일정 기간 동안은 같은 요령으로 지속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면, 매일 천수다라니 108독 이상을 한다거나, 금강경을 7독 이상 한다거나 염불을 삼천 번 이상 한다거나 하는 등이 그것입니다.

만약 가정에서 정기적으로 기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상 생활에 지장을 받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편한 시간과 공간을 정해 놓은 다음, 절에서 기도하는 것과 같이 봉행하면 됩니다.

어쨌든 외부를 향한 기도가 점차적으로 내부지향적으로 바뀌어져가고, 궁극적으로는 '일념에서 무념으로' 진전되어 나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기도를 하는데도 몸과 마음의 자세와 호흡이 중요합니다. 즉 기도와 참회를 하고자 할 때는 앉는 자세부터 바르게 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앉는 자세는 두 무릎을 꿇고 앉는 방법을 취하며 그 밖에 결가부좌(結跏趺坐)나 반가부좌(半跏趺坐)를 선택해서 앉으면 됩니다. 옷차림도 편안한 복장이 좋을 것입니다.

기도할 때에는 앉는 법을 강조하는 것은 바른 자세에서 바른 호흡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바른 호흡이 중요한 것은 호흡이 안정되어 있을 때 자연히 정신도 안정되어 쉽게 기도에 몰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면서 기도를 하다보면 호흡은 자연스레 안정이 되기 때문에 너무 호흡에 의식할 필요는 없습니다.

기도할 때 마음은 첫째 믿음이 중요합니다. 즉 이 기도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며 부처님의 가피가 분명히 나와 함께 함을 깊이 믿어야 하고 둘째로는 참회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평소 우리 자신의 잘못된 생활에 대해 반성하고 기도에 앞서 자신의 마음을 참회하고 비우는 것이요. 셋째로는 주변의 모든 이웃에게 자비로운 마음을 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의 모든 중생이 나와 한 몸임을 깨닫고 그들 모두에게 평화와 안락이 깃들기를 바라며 누구에게도 원망이나 미움을 가지 않는 마음입니다. 이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기도에 임할 때 기도는 참다운 공덕을 쌓게 됩니다.

기도할 때 독송하는 경전은 기도의 내용에 따라 각기 다릅니다. 먼저 경전을 독송하는 것은 경전을 통해서 불·보살님의 서원과 나의 정성이 하나가 되게 하는데 있습니다.

기도 방법에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다섯 가지 덕목이 있는데 그 첫째는 불·보살님께 귀의하여야 하고, 둘째는 향과 꽃으로 공양하고 보시하여야 하며, 셋째는 3배 또는 108배 등으로 예배하고, 넷째는 업장을 소멸하고 복덕을 성취하기 위하여 참회 발원하여야 하며, 다섯째는 불·보살님의 명호를 부르며 정근하는 염송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기도 (祈禱)_ 기도의 종류 

① 관음기도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 일본에 가장 뿌리 깊이 내린 것이 관음신앙입니다. 이 관음신앙과 연관된 경전은 《반야심경》, 《천수경》,《법화경》 등이다. 이 경전은 다른 경전보다 세상에 가장 많이 보급되어 구입하기가 쉽습니다.

관세음(觀世音)보살은 산스크리트어 아바로키떼스바라(Avarokitesvara)를 뜻으로 옮긴 말입니다. 관자재, 관세음, 관음 등으로 음역하기도 합니다. 관세음이란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다 관찰한다는 뜻이며, 사바세계의 중생들이 괴로움에 허덕일 때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청하면 32응신(應身)으로 몸을 나타내어 구원해주십니다.

관음보살상은 어머니같이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시며 후덕한 모습으로 왼손에 연꽃을 들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 연꽃은 중생이 본래부터 구비하고 있는 불성을 표현한 것입니다. 중생이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하고 그의 명호를 부르거나 찬탄, 공양하면 이런 공덕이 있다고 합니다.

불에도 타지 않고 물에도 떠내려가지 않으며, 바람에도 날리지 않고 칼과 몽둥이에 잘리거나 다치지 않으며, 귀신에게 시달리지 않고 쇠고랑을 차지 않으며 도적의 두려움에서 벗어날수 있게 해주신다. 또 항상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공경하면욕심 많은 사람은 욕심을 여의게 하고……아들을 원하면 아들을 낳고, 딸을 원하면 어여쁜 딸을 낳을 것이다.
《법화경》 〈보문품〉

 

② 지장기도

우리나라의 지장신앙은 삼국시대부터 매우 성행하였습니다. 지장보살님은 부처님의 부촉을 받아 도리천에서 중생의 근기를 관찰하고 무불세계(無佛世界)의 육도중생을 교화하는 대비(大悲)보살입니다. 지장보살님은 지혜와 자비를 구족하고 있으며 특히 자비의 실천을 강조하신 분입니다. 지장보살님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이 모두 성불하기 전에는 결코 깨달음을 이루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우신 대비원력의 보살이십니다. 이 보살님은 항상 지옥에 계시면서 오늘도 육도(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를 윤회하는 중생들을 구제하고 계십니다.

《지장보살본원경》에 의하면 지장보살을 예배하고 공경하면 이런 공덕이 있다고 합니다.

풍년이 들며, 집안이 편안하고, 죽은 조상이 천상에 태어나고, 부모가 장수하며, 원하는 것을 얻으며, 수재나 화재가 없고, 헛되이 허비하는 것이 없으며, 나쁜 꿈이 없고, 출입 시 신장이 보호하며, 훌륭한 인연을 많이 만날 것이다.

 

지장 신앙은 우리 나라를 비롯해서 중국,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 봉행되고 있습니다. 이 신앙이 널리 신봉되는 것은 《지장보살 본원경》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부모가 장수하고', '조상이 천상에 태어난다'는 효사상의 영향입니다. 특히 우리 나라에서는 선망부모와 일가친척, 그리고 제반 천도의식을 봉행 할 때 지장기도를 많이 봉행하고 있습니다.

③ 약사기도

인간이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몸이 아프고 병이 들고 늙고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아픈 몸을 다스리기 위해 여러 가지 처방을 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일찍이 만가지 모든 병은 마음에서부터 생긴다고 하는 것을 깨달으시고 모든 중생들에게 마음을 먼저 다스릴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병의 근원인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없애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사람의 모습과 인종, 그리고 문화가 각기 다르듯이 욕심을 버리고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아프고 병든 사람도 있게 마련입니다. 그와 같이 병들어 아픈 사람들이 그 병을 다스리기 위해 약사여래 부처님께 기도 정진하는 것을 약사기도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약사전이 있는 사찰은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으며, 이런 사찰은 아픈 사람이 기도 정진하여 치병의 효과를 보았다는 기록이나 설화가 많습니다.

약사여래는 정확하게 말한다면 약사유리광여래 부처님입니다. 약사여래가 계시는 세계의 이름이 동방에 있는 정유리세계이므로 동방 정유리계의 교주라고 지칭되기도 합니다.

약사여래신앙의 모체인 《약사유리광여래본원경》에는 약사여래의 12가지 서원이 나옵니다. 그 중에서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서원이 정신적, 육체적 병고의 해결과 회복입니다. 그 다음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방법을 설하고 12가지 '원을 성취시켜주는 신령스런 주문'을 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약사여래의 가피를 구하고자 하는 것이 약사여래 기도이며, 5세기 무렵 수나라 시대부터 민간에 유행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④ 칠성기도

우리 민족은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산천과 하늘을 숭배했습니다. 즉 칠성은 하늘, 산신은 대지, 용왕은 물의 상징이자 그 세계의 지배자를 뜻합니다.

불교가 전래되자 산신과 칠성은 자연스럽게 사원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고 불교와 융합하여 계승되었습니다. 이것이 후대에는 도교나 민속신앙과 합쳐져 칠성이나 산신, 용왕에 대한 예경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옛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산신과 칠성에 대한 신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특히 자손창성, 부귀영화, 수명장수를 기원할 때는 일반적으로 칠성기도를 올립니다. 이것은 태양을 숭배하며 하늘의 자손이라 생각했던 조상들의 전통과 관습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이처럼 칠성신앙은 바로 재래의 토착신앙과 불교가 엮어낸 문화입니다.

⑤ 참회기도

참회기도는 진실하지 못한 마음으로 그 동안 알게 모르게 지은 모든 죄업을 소멸하기 위해 부처님께 그 잘못을 뉘우치고 참회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참회기도에는 이참(理懺)기도와 사참(事懺)기도가 있습니다.

이참기도는 과거와 현재에 지은 모든 죄업은 마음에서 생긴 것이며. 마음 바깥에서 일어나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관찰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마음이 본래 공적(空寂)한 줄을 알아서 모든 죄의 모습도 공적함을 보는 것을 말합니다.

사참기도는 몸으로는 부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입으로는 부처님을 찬탄하며, 마음으로는 부처님의 성스러운 모습을 그리면서 과거와 현재에 지은 모든 죄를 참회하는 기도입니다. 참회할 때 외우는 것을 참회문이라 하며, 우리 나라에서는 《화엄경》〈보현행원품〉에 '지난 날 지은 모든 악업은 무시이래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 말미암아 몸과 마음으로 지었사오니 제가 이제 그 모든 것을 참회합니다.' 등의 예가 있고, 또 《천수경》에는 '죄는 자성이 없으니 마음 따라 생길 뿐, 마음이 멸할 때 죄도 없어지네, 죄와 마음이 함께 없어져 모두 공하면, 이것이 바로 참다운 참회라 한다'고 하였으며 신라 때의 원효스님은 《대승육정참회문》을 지어 참회의 본 면목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또 서산대사도 〈선가귀감〉에서 참회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허물이 있으면 참회하고 잘못된 일이 있으면 부끄러워할 줄 아는 데에 대장부의 기상이 있다. 그리고 허물을 고쳐 새롭게 되면 그 죄업도 마음 따라 없어질 것이다.즉 참회란 먼저 지은 허물을 뉘우치고, 다시는 짓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일이다.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안으로 자신을 꾸짖고 밖으로는 드러내는 일이다. 마음이 본래 비어 고요한 것이므로 죄업도 붙어 있을 곳이 없다.

 

기도 (祈禱)_ 간경 (看經) 

불교에서 경전은 부처님의 말씀이요, 교훈이요, 진리 그 자체라 할 수 있습니다. 경전은 부처님 열반 이후 정법을 전하는 보고(寶庫)로 여겨졌고, 따라서 경전을 신행의 지침으로 삼게 된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법화경》〈법사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어디서든지 이 경을 설하거나 읽거나 외우거나 쓰거나 이 경전이 있는 곳에는 마땅히 칠보로써 탑을 쌓되 지극히 높고 넓고 장엄하게 꾸밀 것이요. 또다시 사리를 봉안하지 말아라. 왜냐하면 이 가운데는 이미 여래의 전신(全身)이 있는 까닭이니라.

 

 

경전이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다름 아님을 나타내는 경구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불교경전은 단순한 책이 아니라 부처님의 진신사리로서, 불상이나 불탑과 같이 예배의 대상이다. 뿐만 아니라 책이 귀하던 옛날에는 한 권의 경전이 갖는 의미가 각별했으며 경전을 통하여 모든 교육이 이루어졌으니 경전은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예로부터 우리 선인들이 경전을 통한 수행의 한 방법으로 간경에 지극한 정성을 보인 까닭도 이 때문입니다.

간경은 경전을 보고 읽는 것을 말합니다. 경전은 삶의 바른 길을 제시하는 지혜의 창고입니다. 따라서 경전을 읽고 외우며 몸에 지님으로써 얻게 되는 공덕이 무한히 크기 때문에 간경은 수행의 한 방법으로 정착이 되었습니다.

원래 경전은 중생들에게 깨달음의 길을 널리 펴고자 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경전을 통해 깨달음을 이해하고 그와 같이 실천하기 위해 읽었던 것이나, 뒤에는 읽고 외우는 그 자체가 하나의 수행 법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또한 부처님 앞에서 경전을 읽고 부처님의 덕을 찬탄하며 원하는 일이 속히 이루어지도록 발원하기도 하고 또는 죽은 자를 위해 독경해서 그 공덕으로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바라며 명복을 빌기도 하였습니다.

간경은 뒤에 경전을 읽는 모든 행위를 일컫게 되었습니다.

풍경(諷經), 독경(讀經)·독송(讀誦)이라 하기도 합니다. 이들의 의미를 구별해 쓰는 경우도 있으나, 지금은 흔히 구별 없이 하나의 뜻으로 쓰고 있습니다. 또한 독경·예배 등을 부지런히 한다고 하여 근행(勤行)이라고도 합니다.

옛부터 경전을 읽기에 앞서 먼저 몸을 깨끗이 하고 단정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몸을 깨끗이 하고 단정히 하지 않으면 안된 다고 하였습니다. 몸을 깨끗이 하는 과정을 통해 마음을 추스려 경전의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경전을 읽을 때에는 마음속으로 의미를 이해하면서 보아야 하는데 염불처럼 소리를 내어 읽기도 합니다. 이때는 염불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소리를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경전을 보면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반드시 주위의 스님이나 선지식을 찾아서 그 뜻을 물어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이 경전 읽기의 바른 방법입니다.

 

기도 (祈禱)_ 염불(念佛) 

불교는 중생의 능력과 근기에 맞는 다양한 수행 법이 있습니다. 염불이란 일반적으로 마음속으로 부처님을 항상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흔히 주위에서 '나무관세음보살', '나무아니타불', '나무석가모니불' 등 부처님을 부르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부처님께 귀의하고 모든 것을 부처님의 뜻에 따라 수행하는 것이 염불입니다. 염불에는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를 생각하는 법신염불과 부처님의 공덕이나 모습을 마음에 그려보는 관상(觀象)염불, 그리고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칭명(稱名)염불이 있습니다.

《아함경》에서는 세 가지, 여섯 가지, 열 가지로 염불의 종류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즉 염불을 지극 정성으로 하면 번뇌가 사라져 하늘에 태어나거나 열반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대승경전에서는 삼매에 들어 염불하는 염불삼매를 설합니다. 이에 따르면 염불은 죄를 없애고 삼매 중에 부처님을 친견하는 것은 물론, 부처님의 나라에 태어나길 발원하면 반드시 태어난다(念佛往生)고 합니다. 그래서 《아미타경》에서는 깨달음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라도 임종할 때 일념으로 아미타불을 열 번만 부르면 서방정토에 왕생한다고 하였습니다.

염불은 중국에 와서 그 방법과 내용이 더욱 발전하였습니다. 모든 부처님을 마음속에 떠올리는 '통(通)염불'과 특정한 부처님만을 마음에 떠올리는 '별(別)염불'로 구별하기도 하였는데, 이런 구분보다 어떤 형태로든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고 신앙하는 일이 일반인들이 실행하기가 쉬우므로 나중에는 아미타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을 염불이라 했던 것입니다.

염불은 쉽게 행할 수 있는 수행법으로서 대중의 호응이 높았습니다. 어려운 교리를 선호하는 공부를 하지 않아도 극락왕생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일반대중이 선호합니다. 신라시대의 원효스님이 무애박을 두드리며 '나무아미타불'을 지성으로 부르면 극락에 왕생할 수 있다고 가르치신 이래 염불은 지금까지 불교인의 수행법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염불하는 방법은 부처님을 그리워하면서 명호를 지극히 부르는 것입니다. 즉 언제나 부처님과 함께 하며 살기를 발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염불을 하면서 자신의 소리를 언제나 생생하게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산란해져 입으로는 염불을 하면서 속으로는 외도, 마군, 잡생각을 하게 됩니다. 부처님을 부르는 동작 하나에도 정신을 모아 흐트러짐이 없는 상태가 진정한 염불입니다.

지극 정성으로 염불하면서 부처님을 친견했다는 사람도 있고, 몸에서 빛을 발하는 방광(放光)을 얻었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보다 진심으로 부처님을 그리워하고 생각하는 과정에서 마음에 사심이나 탐욕이 사라지는 경지를 체험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도 (祈禱)_ 정근(精勤) 

정근은 선법(善法)을 더욱 자라게 하고, 악법(惡法)을 멀리 여의려고 부지런히 쉬지 않고 수행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염불과 같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불·보살님의 지혜와 공덕을 찬탄하면서 그 명호를 부르며 정진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산만한 마음을 안정시켜 편안하게 하며 어떤 환경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맑고 밝아지게 하는데 그 의의가 있습니다.

정근을 할 때에는 다른 생각을 다 놓아 버리고 오직 평온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을 믿고 일념으로 정진해야 합니다. 불·보살님의 명호를 부르면서 그 명호에 집착하거나, 무엇인가 얻으려고 하면 오히려 정근에 장애가 됩니다. 항상 자세를 바르게 하고 기운을 안정시켜 몸을 흔들거나 경거망동하지 말아야 하며, 음성은 너무 크게도 작게도 하지 말고 기운을 적당하게 하여 고르게 해야 합니다. 정근할 때 마음을 안정시키는 방법의 하나로 염주를 돌리거나 절을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리고 정근은 대상과 일정한 시간을 정하여 할 수도 있습니다. 대개 아침과 저녁으로 예불을 모시 때에는 석가모니불 또는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며 정근를 하고, 부처님의 위신력에 의해서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발원할 때는 나무아미타불 또는 지장보살의 명호를 부르며 정근을 합니다. 정근하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① 석가모니불정근

〈거불(擧佛)〉 나무 불타부중 광림법회(절)
나무 달마부중 광림법회(절)
나무 승가부중 광림법회(절)
시작 나무 영산불멸 학수쌍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반배)
(또는 나무 삼계도사 사생지부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마침 천상천하무여불 시방세계역무비
세간소유아진견 일체무유여불자(반배)
(천상 천하 어느 곳에도 부처님 같으신 분 없으시고
시방세계 둘러봐도 비길자가 전혀 없도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살피어도
부처님 같으신 분 천지간에 전혀없네.
제가 이제 일심으로 귀의합니다.)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당생극락국 동견무량수 개공성불도(절)

② 관세음보살정근

〈거불(擧佛)〉나무 원통교주 관세음보살(절)
나무 도량교주 관세음보살(절)
나무 원통회상 불보살(절)
시작 나무 보문시현 원력홍심 대자대비 구고구난 관세음보살
(반배)
(사바세계 두루하사 크고 깊은 원력으로 자비심을 펼치시어 우리
를 고난에서 구하시는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합니다.)
관세음보살..........
마침 관세음보살 멸업장진언
(관세음보살이 업장을 멸해주시는 진언)
옴 아로륵계 사바하 (3번)

구족신통력 광수지방편
시방제국토 무찰불현신
고아일심 귀명정례 (반배)
(신통한 힘 갖추시고 지혜 방편 널리 닦아 시방의 모든 세상 두
루 그 모습 나타내시는 관세음보살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귀의하
옵니다.)

원멸사생육도 법계유정 다겁생래 제업장
아금참회계수례 원제죄장실소제 세세상행보살도(절)
원이차공독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당생극락국 동견무량수 개공성불도(절)

③ 아미타불정근
〈거불(擧佛)〉 나무 극락도사 아미타불(절)
나무 좌보처 관세음보살(절)
나무 우보처 대세지보살(절)
시작 나무 서방대교주 무량수여래불 나무아미타불(반배)
(서방 대교주 무량수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마침 아미타불 본심미묘진언
(아미타 부처님의 미묘하신 진언)
다냐타 옴 아리다라 사바하 (3번)

계수서방안락찰 접인중생대도사
아금발원왕생 유원자비애섭수
고아일심 귀명정례 (반배)
(서방정토 안락국에 중생을 인도하는 아미타 부처님께 머리 숙여
원하오니 왕생토록 하옵소서. 일심으로 바라오니 자비로써 거두소
서. 지극한 마음으로 귀의합니다.)

원멸사생육도 법계유정 다겁생래 제업장
아금참회계수례 원제죄장실소제 세세상행보살도(절)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당생극락국 동견무량수 개공성불도(절)

④ 지장보살정근
〈거불(擧佛)〉 나무 유명교주 지장보살(절)
나무 남방화주 지장보살(절)
나무 대원본존 지장보살(절)
시작 나무 남방화주 대원본존 지장보살 (반배)
(중생교통 건지시는 원력의 으뜸이신 지장보살님께 귀의합니다.)
지장보살..........
마침 지장보살 멸정업진언
(지장보살이 업장을 멸해주시는 진언)
옴 바라 마니다니 사바하 (3번)


지장대성위신력 항하사겁설난진
견문첨례일념간 이익인천문량사
고아일심 귀명정례 (반배)
(지장보살 위신력은 말로 하기 어려웁고 잠깐 사이 보고 듣고 순간만 생각해도 그 복덕은 무량하니 지극한 마음으로 절하옵니다.)


원멸사생육도 법계유정 다겁생래 제업장
아금참회계수례 원제죄장실소제 세세상행보살도(절)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당생극락국 동견무량수 개공성불도(절)

 

 

참선(參禪) 

불교 수행법하면 누구나 참선을 떠올립니다. 참선은 익숙하면서도 왠지 어렵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참선은 앞서 공부해온 참회나 발원 그리고 기도 등과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앞의 것들이 다분히 외부 지향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면, 참선은 철저히 내부지향적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밖을 향해서 무언가를 간구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돌이켜 비춘다는데 참선의 특징이 있습니다.

이것은 가장 불교다운 수행 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초기 경전에 의거해 보건대, 부처님의 제자들은 다만 법문을 듣고 각자 나무 밑이나 한가한 곳에 가서 사유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은 외부의 어떠한 신과 같은 대상을 향하여 복을 빌거나 현실적 문제의 해결을 바라도록 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다만 스스로의 지혜를 돌이키도록 하고, 자비심으로써 세상을 살아나가도록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참선은 가장 불교적 수행이라 할 수 있으며, 지금까지 해온 참회나 발원 혹은 기도 등도 결국은 참선을 제대로 하기 위한 준비과정 내지는 적응단계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닙니다. 참회를 통해서 비워진 마음자리에 발원을 채움으로써 자기변화가 시작되었고, 기도를 통하여 강력한 변화를 체험하였다면, 이제 그 마음자리 자체를 밝히는 것이 바로 참선입니다.

참선으로 대표되는 수행법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전해집니다. 태국, 스리랑카, 미얀마 등 동남 아시아의 남방 불교권에서는 비파사나(vipassana)라는 수행법이 전해지고, 한국을 비롯한 중국, 일본 등 북방 불교권에서는 선종의 화두(話頭)나 공안(公案)의 의미를 추구하는 간화선과 조용히 자신의 본성을 비추어보는 묵조선(默照禪)등의 수행 법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현재 조계종에서 수행의 방법으로 삼는 참선은 불교의 여러 수행 법이 중국에 전해져 현재의 형태로 정리된 것입니다. 이러한 참선 수행법 이전의 여러 가지 수행법을 관법수행이라고 합니다. 참선에 대해 정리하기에 앞서 먼저 이 관법수행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

 

참선(參禪)_관법수행 (참선 이전의 수행법) 

① 수식관(數息觀)

고요히 사유하다보면 여러 생각들이 끊임없이 생겼다가 소멸합니다. 어느 때는 찰나지가에 나의 생각을 이끌고 어디론가 가버리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과거, 현재, 미래를 넘나들며 기억을 되살리기도 합니다. 때문에 처음 수행에 입문하는 사람은 자기 생각을 붙잡을 수 가 없습니다. 정말 한 생각에 몰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호흡을 관찰하며 공부하는 법이 나왔는데 이를 수식관(數息觀)이라 합니다. 이 수행은 숨을 들이쉬면서 들숨을 관찰하고, 숨을 내쉬면서 날숨을 관찰하는 수행법입니다. 이때 호흡은 무리하지 않는 범위에서 천천히 깊게 숨쉬기를 합니다.

숨쉬기는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 행위이지만 숨에 깊이 의식을 집중하고 살아가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긴장하거나 불안한 마음이 있을 때 천천히 그리고 깊게 숨을 쉴 때 마음의 긴장과 불안이 어느새 풀어집니다. 이러한 긴장이완 효과뿐만 아니라 수식기관은 분별심을 없애는 수행법입니다. 경전에서는 수식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조용한 장소를 택한다. 그리고 결가부좌한다. 마음에서 다른 생각을 없애고 눈을 코 끝에 둔다. 그리고 호흡에 의식을 집중한다. 즉 긴숨이 나가면 숨이 길다고 알고, 는 숨이 짧으면 숨이 짧다고 알고, 나가는 숨이 차면 이 차다고 알며, 들어오는 숨이 차면 또한 숨이 차다는 을 알고, 들어오는 숨이 따뜻하면 들어오는 숨이 따뜻하다고 알며 나가는 숨이 따뜻하면 나가는 숨이 따뜻하다고 다. 몸을 모두 관찰하여 들숨·날숨이 모두 이와 같음을 다. 숨이 있으면 숨이 있다고 알고, 숨이 없으면 숨이 없다고 안다. 만약 숨이 마음으로부터 나가면 또한 마음으로 부터 나간다고 알고, 만약 숨이 마음으로부터 들어오면 또한 마음으로부터 들어온다고 안다. 이와 같이 사유하여 욕심으로부터 해탈을 얻고, 악함이 없으며, 깨닫고 관찰함에 기쁨과 편안함을 얻으면 이를 초선(初禪)의 단계라고 한다

이 수식관은 마음에 더 이상 분별하는 마음이 없어지는 단계를 최고의 경지로 삼는 수행법입니다.

 

② 부정관(不淨觀)

부정관(不淨觀)이란 말 그대로 우리의 몸의 부정한 모습을 보는 것을 말합니다. 그 방법은 이렇습니다.

묘지로 가서 시체(해골)의 부정한 모습을 보고 거처로 돌아와서 발을 씻고 편안히 앉아 마음과 몸을 유연하게 가지고 모든 번뇌를 떠나 그 시체와 나의 몸을 비교하며 관한다. 즉 마음을 집중하여 발목, 정강이, 넓적다리뼈, 허리뼈,등뼈, 옆가슴뼈, 손뼈, 어깨뼈, 목뼈, 턱뼈, 이빨, 해골 등에마음을 집중한다. 또한 마음을 미간(眉間)에 둔다. 그 다음에 앉은자리, 한 방안, 한 집안, 한 가람, 한 고을, 한 나라에 가득히 썩어가는 시체가 있는 것을 관한다.이것을 부정관이라 한다.

이 부정관은 탐욕과 애욕이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이 무상함을 깨우쳐 탐욕과 애욕에서 벗어나게 하는 수행법입니다.

 

③ 지관(止觀)과 삼매(三昧)

지(止)는 산스크리트어 사마타(samatha)의 의역으로 마음이 적정하여 온갖 번뇌를 그침을 말합니다. 수행을 하면서 마음이 여러 가지로 흔들려 정신의 집중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지혜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따라서 마음에 왔다갔다하는 망상의 흔들림을 보고 이들이 모두 찰나에 변화하는 무상한 것임을 알고 멈추게 하는 작업을 지(止)라고 합니다.

관(觀)은 산스크리트어 비파사나(vipassana)의 의역으로 마음이 지의 상태에 이르면 자신의 마음 소게 왔다갔다하는 마음의 움직임을 스스로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보게 되면 현상의 세계에서 쉽게 끌려가던 마음씀씀이를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그 동안 무엇에 마음이 흔들리고 욕심을 부리고 조급해 했는지를 알게 됩니다. 이러한 앎은 자신을 지혜의 세계로 이끌고 갑니다.

삼매는 산스크리트어 사마디(samadhi)의 음사어로 중국에서 한역을 하면서 삼매로 정리된 것입니다. 삼매는 지관의 상태에서 자신의 마음을 보는 지혜가 깊어져서 외부의 어떠한 소리나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고 집중하고자 한 대상에 마음이 몰입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참선하는 사람은 참선삼매, 염불하는 사람은 염불삼매에 들었다고 말하고 또는 무아지경에 빠졌다고 합니다. 흔히 독서에 몰입한 사람을 보고 독서삼매에 빠졌다고 말하는 예가 여기에 해당된다 하겠습니다. 이러한 경지에서만이 최상의 지혜인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참선(參禪)_참선이란? 

참선이란?

참선(參禪)이란 '선(禪)에 참입(參入)한다'는 뜻입니다. 참입이란 마치 물과 우유처럼 혼연일체가 된다는 의미이며, 선은 산스크리트어 드야나(dhyana)를 음사한 것으로 '고요히 생각한다' 또는 '사유하여 닦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옛 문헌에서는 사유수(思惟修)로 번역하였다. 따라서 참선이란 '깊이 사유함' 이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참선의 진정한 의미는 '본마음·참나'인 자성자리를 밝히는데 있습니다. '본마음·참나' 는 어느 누구에게나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으며, 청정무구하여 일찍이 티끌세간 속에 있으면서도 물든 일이 없이 완전합니다. 이러한 청정무구심에 관해서는 사실상 말로써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다만 비유를 통해서 그 일단을 엿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일례를 들어보자면, 금강경에 관한 다섯 스님의 주석을 함께 모은 〈금강경호가해〉에 다음과 같은 야부스님의 게송이 있습니다.

'대나무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하나 일지 않고, 달빛이 연못을 꿰뚫어도 물에는 흔적하나 남지 않네.'
'竹影掃階塵不動, 月穿潭底水無痕'

- 대나무 숲 사이로 바람이 훑고 지나가면 대나무가 움직일 때마다 마당에 비친 대나무 그림자도 함께 움직인다. 그러나 아무리 대나무 그림자가 마당과 섬돌을 쓸어내려도 마당 위의 티끌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림자가 아무리 움직인들 마당이 쓸어질리 있겠는가? 이와 마찬가지로 보름밤의 교교한 달빛이 저 맑은 연못 밑바닥까지 환하게 비추어준다고 하더라도 물에는 달빛이 뚫고 지나간 자취가 남을 까닭이 없다. -

 

이것은 비록 세파에 찌들고 시달려 살아가는 인생이라 할지라도 본래의 성품은 조금의 이지러짐도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것을 '본마음'이라고도 하고 '참나'라고도 하며, '자성청정심'이라고도 합니다.

참선은 이러한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에 관한 확고한 믿음 내지는 인식 상에서 출발하여야 합니다. 즉 내가 본래 완벽하다는 데서 출발하는 수행인 것입니다. 따라서 완벽을 향해서 나아가는 수행, 즉 불완전한 나를 완전한 나로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본래 완전한 나를 확인해 나갈 따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참선(參禪)_참선의 자세 

참선의 자세

참선수행을 한다고 하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얼핏 좌선의 자세를 연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참선수행은 '아무 생각도 안 하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까지 해오던 일체의 사량 분별을 쉬는 데서 참다운 수행이 시작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선종가람의 입구에는 '이 문안에 들어와서는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 알음알이가 없는 텅 빈 그릇에 큰 도가 충만하리라.(入此門內 莫存知解 無解空器 大道充滿)' 라는 글귀가 붙어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알음알이를 쉰다고 하는데, 그러면 알음알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지금까지 머릿속에 간직해온 온갖 지식과 분별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던가, 이것은 맞고 저것은 틀리다던가, 이것은 이익이 되고 저것은 손해가 된다는 등의 판단분별이 모두 알음알이에 불과한 것입니다.

참선을 하는데는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아야 하겠지만,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환경이 조용한 곳이 좋겠습니다. 예를 들면 절에서는 부처님이 모셔진 법당이나 선방 등의 정해진 공간에서 하고, 집이나 직장에서는 특별히 참선을 할 수 있는 장소가 없기 때문에 일정한 곳을 선택해서 하면 될 것입니다.

참선의 자세도 행주좌와(行住座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 걸림없이 자세를 취해도 되겠지만 전통 수행법인 결가부좌(結跏趺座)나 반가부좌(半跏趺座)를 하는 것이 좋다. 결가부좌와 반가부좌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주위를 정리 정돈한 다음 좌복을 깔고 그 자리에 편하게 앉습니다.

② 앉는 자세는 먼저 왼쪽 다리를 오른쪽 다리의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③ 남은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 허벅지 위에 올려놓으면 됩니다.

④ 허리와 양어깨는 편한 상태로 쭉 펴고 두 손은 먼저 왼손 등을 오른손 위에 포개어 올려놓고 엄지와 엄지를 살짝 마주 닿게 하면 됩니다.

이 자세는 오랫동안 앉아서 수행하는데 적합합니다. 그러나 초보자는 다리에 쥐가 나는 등의 고통이 따를 수 있으므로 힘이 든다고 여길 때는 몸을 움직여서 굳은 자세를 유연하게 풀어 줄 필요가 있습니다. 익숙해 질 때까지는 약 30∼50분 등으로 시간을 정해 놓고 단계적으로 시간을 늘여 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또한 참선을 한다고 억지로 오래 앉아 있다 보면 몸에 무리가 생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때는 아쉬워 말고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법당이나 방안 또는 도량을 거닐면서 몸의 균형을 맞추어 조절해 주는 것이 좋다. 이것을 방선(放禪) 또는 경행(經行)이라 합니다.

이 때에는 화두를 잊고 잡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방선 또한 참선의 연장이기 때문입니다.
반가부좌 결가부좌가 어려운 사람들에게 적합한 것으로 결가부좌 자세에서 다리를 한 쪽만 다른 다리의 허벅지에 올려놓는 자세입니다.

참선을 할 때는 호흡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냥 마음대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하면 마음이 답답하고 혼란스러워집니다. 참선할 때 호흡을 잘하면 정신이 집중되고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그래서 참선할 때 호흡은 단전호흡법을 취하되 단전호흡법에 머무르면 안됩니다.

다음의 순서로 따라 해보자. 먼저 자세를 바르게 하고 거친 숨을 몇 번 몰아 쉰 다음 입으로 숨을 쉬는 것이 아니라 코로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 쉽니다.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콧구멍의 미세한 털도 움직이지 않을 만큼 조용히 숨을 쉬어야 합니다. 그리고 호흡은 아랫배 즉, 단전까지 내려보냈다가 천천히 내쉬는 방법으로 계속하면 됩니다.

어떤 사람은 행주좌와 어묵동정이 모두 수행 법 아님이 없다고 해서 기존의 수행법과 선지식의 가르침을 부정하고 각자 나름대로 독특한 수행법을 개발해서 공부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입니다. 따라서 불교의 수행법을 배우는 사람은 전래된 수행법과 선지식의 말씀을 의지해서 수행법을 잘 익혀서 공부해야 할 것입니다.

 

선(參禪)_간화선(看話禪) 

인도불교가 중국불교로 이어지면서 수행체계에서도 하나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이른바 화두(話頭)나 공안(公案)인데 이는 하나의 문제를 깊이 참구하여 그것의 본래 의미를 확실히 깨닫는 간화선으로의 전개인 것입니다.

이 수행 법은 공안이나 화두를 통해서 수행자로 하여금 큰 의심을 일으키게 하고 스스로 그 의심을 해결하여 깨달음을 얻게 하는 수행 법입니다. 인도 불교의 선정법은 4성제, 8정도, 12연기 등의 교리의 의미를 수행자가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데 반해, 중국의 선종에서는 언어보다는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근본 내용의 정확한 의미를 곧바로 찾아 들어가 확인하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참선은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하여 경전의 가르침에 매이지 말고 그 밖에 길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달마대사를 중국선종의 초조(初祖)로 삼아 6조 혜능대사에 이르기까지 선종은 중국에서 번창하였습니다. 초조 달마스님과 2조 혜가스님과의 만남 이야기는 극적입니다. 마음이 괴로워 찾아온 혜가스님에게 달마스님은 '아픈 마음을 가져 오라. 그러면 내가 치료해주겠다' 고 일갈합니다. 특히 선종에서는 극단적인 모순으로 보이는 말도 서슴치 않고 합니다. 중국의 조주스님은 어떤 스님이 와서 물어보기를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니 '있다' 고 하였고 다른 스님이 와서 물으면 '없다' 고 하여 앞뒤가 다른 대답을 하기도 하였는데, 이런 말이 1,700여개나 정리되어 공안이나 화두로서 후대 수행자들이 풀어야 할 문제로 남아있습니다.

이처럼 간화선은 초심자들에게 매우 어렵게 여겨지지만 앞의 수식관보다 훨씬 확실하고 호방한 수행법이어서 출가수행자들이 주로 몰두하는 방법입니다.

 

참선(參禪)_ 참선 수행의 유의점 

참선수행을 하면서 수행이 제대로 되어지고 있는지 스스로 확인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굳이 선지식에게 묻지 않아도 점검이 어느 정도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선 스스로 마음이 점차 너그러워지고 있는지 좁아지고 있는지 확인하면 됩니다. 시간이 갈수록 세간사에 담담해지고 공부가 재미가 나면 제대로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와는 달리 점차 남의 허물이 눈에 더욱 잘 보이고 세간사의 시비에 관심이 끊이지 않는다면 점검해볼 여지가 있습니다.

또한 배우자나 아이들에게서 우리 남편, 부인 혹은 어머니가 절에 다니더니 사람이 많이 달라졌다는 소리를 들으면 좋습니다. 그래서 주의의 다른 이에게도 우리 배우자 혹은 어머니처럼 절에 보내라고 추천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더욱 좋습니다.

절에 다니면 생활에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5년을 다니거나 10년을 다니는데도 전혀 변화의 조짐이 없거나, 주위에서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면 돌이켜 반성할 여지가 있습니다.

참선을 하는 것은 '나'를 없애는 연습입니다. '작은 나'를 없애고 '큰 나'의 입장에서 살아가는 연습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부처님 앞에서 겸허해지고 공경심을 갖듯이, 집이나 직장에서 겸허함과 공경심으로 모든 이들을 대할 수 있다면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 됩니다.

궁극적으로 남편이나 직장 상사를 부처님이나 스님 대하듯이 더욱 공경하는 마음으로 대하게 되고, 아랫사람에게 겸허한 태도를 가질 수 있다면 참으로 절에 다니는 보람이요, 진정한 수행이 됩니다.

이렇게 애기하면, 상대방이 그럴 만한 자격을 못 갖추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자격과 조건이 되는 이를 공경하기는 쉽습니다.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일정한 조건을 아직 갖추지 못한 이에게 공경심과 겸허함으로 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야말로 결국 남이 아닌 자기 스스로를 존중하는 귀한 마음가짐으로서, 일상에서 선을 닦는 마음가짐인 것입니다.

한편 참선을 제대로 닦는 이라면 복 짓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복에는 유위(有爲)의 복과 무위(無爲)의 복이 있어서, 참선은 무위의 복을 짓는 최상의 수행방법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선이야말로 무엇보다도 선지식과의 만남을 필수로 하며, 선지식과의 만남은 복 짓는 일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해야 합니다.

선지식은, 그저 찾아다닌다고 해서 만나지는 것이 아닙니다. 유위의 복이든 무위의 복이든 열심히 짓고 있다보면 저절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저 자신이 복 지은 만큼 나타나게 되어있습니다. 무한한 복을 지은이에게는 무한한 선지식이 다가오며, 자그마한 복을 지은이에게는 자그마한 선지식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선지식이 없다고 탓할 일이 아니라, 자신의 복이 부족함을 인식하고 꾸준히 복을 지어나갈 일입니다.